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르후 전투 (문단 편집) === 명나라군의 실상 === 명군이 후금군을 얕본 것은 아니었고, 후금보다 적어도 2배의 병력을 동원한 만큼, 이 전쟁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내보낸 최고위급의 장수 5명([[양호(명나라)|양호]], 두송, [[유정(명나라)|유정]], 마림, 이여백)들도 모두 평판이 괜찮은 장수들이었다. 명나라군의 경우는 [[만력 3대정]]을 비롯하여 16세기 내내 내란 및 외침이 잦았기 때문에 실전 경험은 많았고, 장수들도 경험이 풍부했다. 그러나 명나라는 중기에 [[환관]]의 국정농단 및 사대부와 환관 사이의 권력투쟁, 여기에 만력제의 태업으로 국정이 마비되었고, 이 때문에 군제의 근간을 이루는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C%9C%84%EC%86%8C(%E8%A1%9B%E6%89%80)|위소군]] 제도가 무너지면서, 명나라의 국방력 자체가 약화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조선에서도 만력제가 명나라의 국정을 돌보지 않아 명군이 약해졌다고 디스할 정도였다.[* (출처) "이 무렵 황제는 이미 정무를 살피지 않고 환관(宦官)이 용사(用事)했으므로, 군용(軍用)이 계속되지 못한 데다가 제군이 경솔히 진격하여 패전하자, 유 도독은 스스로 목매어 죽은 터였다(時皇帝已倦勤, 閹豎用事, 軍興不繼, 又諸軍輕進失利, 都督自縊死)."- 조증(詔贈) 요동백(遼東伯) 김 장군(金將軍) 묘비(廟碑)] 장부상으로는 명군이 3~400만 명의 병력을 자랑했지만, 위소군으로 편입된 병력의 상당수가 적은 보수와 형편없는 처우 등을 문제로 이탈하면서 명나라 말기의 군사력은 초기에 비해 형편없는 수준으로 추락하게 되었다. 명나라는 군인들의 보급 문제를 [[둔전제]]로 해결하려 했는데, 원말 명초 당시 중원에 비옥한 황무지가 널려있었을 때는 둔전 운영만으로도 병졸들의 봉급을 제대로 지불할 수 있었지만, 이후 명나라의 국경이 확대되고 둔전 위치가 사막이나 밀림 등으로 이동되면서, 병사들이 둔전에서 충분한 소출을 올리지 못하고 제대로 봉급을 받지 못하는 일이 증가했다. 위소군은 둔전제를 기반으로 한 제도였고, 둔전이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면서 위소군들의 기강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게 되었다. 명나라 조정은 해결책으로 군인들에게 은화를 지급하고, 군량을 구입하게 했지만 이는 군인들이 훈련 대신 부업에 열중하게 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명나라 조정의 실제 동원 가능한 병력도 다 털어봐야 장부상 병력의 1/3에 불과했으며,[* 마르틴 데 라다의 기록에 따르면 명나라 조정에 있는 장부상의 병력은 400만여 명에 군마 78만 필이었다고 한다.] 이들 또한 상당수가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한 무늬만 병력인 상태였다.[* 당시 장수들은 위소군 병졸들의 반발이 두려워서 훈련조차 제대로 시키지 못했다는 유생들의 한탄섞인 기록을 자주 볼 수 있을 정도이다.] 위소군에 등록된 인원 중 전투에 쓸모없는 노약자의 숫자도 많았다. 임진왜란때 조선 파병 당시에도 명군은 화력에 의존하는 한편, 소위 '가정'이라 불리는 군벌 휘하의 정예 사병들이 선두에 서고,[* 이들은 여타 위소군에 속한 병사들에 비해 4~5배 정도에 달하는 봉급을 받았다. 당연히 박봉에 시달리는 위소군들의 사기가 더 떨어진 것은 당연했다.] 후속 병력이 전투를 마무리짓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사르후 전투에서 군대의 주력이 되어야 할 군벌 및 가정 집단은 [[만력 3대정]]으로 상당부분 소모된 상태였고, 명나라도 이 사실을 잘 알았기에, 조선에 지원군 파병을 그렇게 강조한 것도 실상은 정예병이 하나라도 더 필요해서였다. 종합적으로 본다면 사르후 대전에 출진한 명군은 전국에서 병력을 긁어모았지만, 객관적인 면에서는 결코 정예병력이 아니었고 오합지졸이었다는 점이다. 이런 군대로 원래부터 말타기와 활쏘기에 귀신같은 여진족 출신에, 지난 30년 동안 실전으로 단련된 누르하치의 후금 군대에 맞서 싸우게 되었다는 점이다. 사르후 전투 직전의 명나라 군대가 엉망진창이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있다. 명군에서 군령 위반자를 참수할 때 도부수가 내리친 칼날이 녹슬어서 목이 잘려지지 않아 세 번이나 반복해서 칼날을 내리쳐야 했으며,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한 무술 시범 현장에서 기마병이 가진 창의 날 부분이 녹슬어서 떨어졌다고 한다. 그만큼 명군의 장비 관리가 부실했고, 불량 무기가 많았으며 장비 점검 상태가 형편없었던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